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서양 전투 (문단 편집) == 제2기: 1940년 6월 ~ 1941년 2월 : 첫 번째 행복한 시간 == > '''독일 전쟁 지침서 154'''[* 히틀러가 되니츠에게 U보트로 무자비한 공격을 허락하고 지시한 내용이다.] > >아무도 구조하지 말것. >날씨, 육지에서의 거리는 상관하지 말것. >배와 자신의 안전만 고려할것. >우리는 이 전쟁에서 꼭 이겨야 한다. >적군이 우리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이제 더 이상 문제될 건 없다. [[1940년]] 6월, 대서양 전투의 근본을 뒤바꿔버릴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프랑스의 항복'''이었다. [[프랑스]] 항복 직후 독일은 즉시 프랑스의 대서양 연안을 모두 군정지역으로 독일군 관할하에 두기로 [[비시 프랑스]]와 협정을 맺었다. 그동안 [[함부르크]], [[브레멘]], 빌헬름스하펜 등 독일의 [[북해]] 연안에서 출발하여 북해를 지나 영국 북부를 빙 돌아서 대서양으로 나가야만 했던 U보트였다. 이제는 로리앙, [[보르도]] 등 프랑스 항구에서 출격하여 바로 대서양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1차 대전 당시의 U보트 작전과 근본적으로 다른 변화였다. 기술적 발전 없이도 U보트의 작전반경 및 작전기간이 혁신적으로 증가한 것이다. 아울러 프랑스 해군의 함정들이 대서양 전투에서 이탈한다는 점도 무시못할 요소였다. 이러한 전략적 변화에 기반하여, 그 때까지 긴급 건조한 것을 합쳐도 겨우 40척에 불과한 U보트[* 칼 되니츠 제독이 항상 아쉬워 할 정도로 숫자가 적었다.]들이 당시 잠수함 전대 사령관이던 [[칼 되니츠]]가 도입한 '''[[울프팩]] 전술'''(Rudeltaktik)[* 울프팩전술을 가장 화려하고 멋있게 볼 수 있는 곳은 영화 [[그레이하운드(영화)]]이니 궁금하다면 꼭 보도록 하자.]을 통해 수십배의 연합군 상선들을 격침시키는 괴력을 발휘하였다. 여기서 울프팩 전술에 대해 잠깐 설명하자면 아래와 같다. * 기존의 잠수함 전술: 잠수함이 독자적으로 결정한 일정 수역에서 매복했다가 지나가는 배를 발견하면 단독으로 습격하는 것. 홀로 다니는 배를 습격하는 것에는 유리하지만, 상대방이 호송선단을 조직할 경우 대다수의 잠수함은 놀게 되고, 어쩌다가 호송선단을 발견한 잠수함도 고작 1-2척의 손해를 가하거나 역으로 호송선단 호위함에게 격침당하는 약점이 있다. * 울프팩 전술: 육상에 있는 지휘소가 미리 잠수함들을 호송선단이 지나갈 것으로 예측되는 수역에 분산해서 배치한 후, 배치된 잠수함 중 하나가 호송선단이 지나가는 것을 발견하고 무선으로 지휘소에 알리면, 지휘소는 제한시간 내에 해당수역에 갈 수 있는 모든 잠수함을 소집해서 호송선단을 잠수함 떼가 습격하는 방식이다. 이러면 호송선단에 엄청난 피해를 줄 수 있으며, 호송선단의 호위함 숫자가 적으면 호위함까지 같이 물고기 밥으로 만들어줄 수 있다. 덕분에 영국은 물자 부족으로 심각한 곤란을 겪게 되었다. 얼마나 당시 상황이 심각했는지 [[윈스턴 처칠]]이 전쟁중 가장 두려운 적은 U보트였다고 회고했던 시점이 바로 이 때였다. 그래서 유보트 노이로제에 걸린 처칠은 이른바 빙산 항공모함이란 희대의 엽기적인 아이디어([[하버쿡 프로젝트]])를 내놓기도 했다. 게다가 영국은 소나의 전신인 ASDIC[* [[1916년]]부터 개발되었으며 [[1918년]] 정도부터 보안을 위해 이름을 모두 ASD(Anti-Submarine Division; 대잠탐색부서)로 바꿔부르면서 붙은 이름이다. 예를 들어 핵심부품인 석영(quartz)은 ASDivite(-ivite는 광물에 붙는 이름), 장치는 원래 supersonics 라고 불렸으나 보안상 모든 문서에서 ASDics로 바뀌었고 이후로 그냥 아예 장치의 이름이 ASDIC이 되었다(이니셜인 것처럼 만든 이중보안). 이후 [[1939년]]에 옥스포드 사전에서 해군에 ASDIC이 뭐냐고 물어봤을때 연합군 대잠 탐지 수색위원회(Allied Submarine Detection Investigation Committee)라고 대답하여 이렇게 사전에 실려버렸다.]의 성능을 믿고 [[구축함]] 등 대잠전력 확대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야간에 수면 위로 부상한 후 어뢰를 날려대는 유보트를 상대로 ASDIC만으로는 잠수함 탐지와 추격에 한계가 있음을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를 가리켜 유보트 승조원들은 "Happy time", 소위 말해 잘 나가던 시절이라 불렀다. U보트 에이스 [[오토 크레치머]](Otto Kretschmer)와 [[요아힘 셰프케]]가 국가적 영웅이 된 시기가 이 시점으로 특히 오토 크레치머는 빈약한 호송선단의 외곽을 뚫고 중앙에서 부상하여 함수와 함미에서 어뢰를 연달아 발사하는 대담한 전술과 함께 어뢰 한발에 배 한척(Ein torpedo, ein schiff)이라는 구호로 유명했다. 영국은 대전 이전부터 영연방을 포함한 대규모 상선단을 조직했지만 효과적인 대처법을 마련할수 없었고, 월평균 30만 톤 이상의 귀중한 물자가 대서양에 가라앉았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영국은 금쪽같은 [[카리브해]] 군항들을 미국에 넘기고 1차대전 때 만든 구식 [[구축함]]을 받아오는 등 대잠전력 확장에 큰 노력을 기울인다. 이건 상당한 희생이었는데 영국은 [[17세기]] 이래로 차지하고 있었고, 미국의 팽창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중엽까지 유지하고 있었던 카리브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상실하는 결과가 초래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효율적인 수송선단 편성, 독일 해군 암호체제의 해독 성공으로 [[1941년]] 말이 되면 영국과 독일의 입장은 서서히 역전, 영국의 구축함, [[초계함]] 등의 대잠함선에게 격침당하는 U보트가 늘어나는 반면 독일군의 영국 수송선단 격침 전과는 갈수록 줄어들게 된다. 사실, 이런 상황은 이미 예견된 상태였다. 개전 전에 [[칼 되니츠]] 제독은 연합군이 개전 초기의 충격에서 벗어나기 전까지 최소한 300척의 U보트가 있어야 대서양 전투를 성공할 수 있다고 주장한 상태였다. 왜 300척인가 하면 통상적인 함대 운용으로는 현장 배치 100척, 이동중 100척, 수리 및 보급 100척이 되기 때문에 '''항시 100척이 북대서양에 출격하는 상태'''가 되며, 이렇게 되면 진짜로 대서양 전투에서 이길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당장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가용 잠수함이 40척인 데다가, 운이 좋아도 출격한 잠수함이 10척이면 대박이고, 어떤 경우에는 1척도 출격하지 못한 날이 많았는데도 엄청난 성과가 났는데, 그것보다 10여 배 이상 많은 잠수함이 출격했다면... 영국을 말려죽이고도 남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알리바바#s-1|되니츠와 300척의 유보트]]-- 설상가상으로 전쟁 초기에 이미 포켓전함 그라프 쉬페를 잃고 [[노르웨이]]에서 대부분의 구축함이 격침되거나 반파된고, 취역한지 6개월도 안된 [[블뤼허(순양함)|블뤼허]]를 잃은데다가 차례로 [[비스마르크]], [[샤른호르스트]] 등의 대형함들을 영국군과의 교전으로 잃어가면서 독일 해군 수상 전력은 사실상 있으나마나한 존재가 되어간다. 나중에 [[그나이제나우]]와 [[티르피츠]]마저 [[영국 공군]]에 의해 각기 대파와 격침이라는 최후를 맞이하면서 사실상 독일 해군의 대형함은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독일 해군이 선택할수 있는 유일한 카드는 밀리기 시작했지만 유보트를 이용한 통상파괴전밖에 없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The_battle_of_the_Atlantic_1941_map.svg.png]] 1941년 대서양전투 전역. 검은색 라인이 지상발진 항공기의 작전반경, 푸른색 점은 격침된 영국 수송선의 위치이다.초록색 점선은 당시 연합국의 주요 수송 루트이다. (위키피디아 출처)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